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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는 아닙니다. 너무 좋아 사자후 공간 정도······.

 

 

2024.10.29 달쮸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그런 바보 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느 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

달쮸

2024.10.29 달쮸

심장에 장전된 차디찬 폭약을 향해 타들어가던 불꽃은 없다. 더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 혈관의 내부처럼, 작동을 멈춘 승강기의 통로처럼 그녀의 입술 안쪽은 텅 비어 있다. 여전히 말라 있는 뺨을 그녀는 손등으로 닦아낸다.
눈물이 흘렀던 길에 지도를 그려뒀더라면.
말이 흘러나왔던 길에 바늘 자국을, 핏자국이라도 새겨뒀더라면.

하지만 너무 끔찍한 길이었어.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달쮸

2024.10.28 블팡

죽은 이의 이름을 휴대폰 주소록에서 읽는다. 나는 그를 알 수가 없다. 죽음은 아무에게도 없는 어떤 것이니까. 신전의 묘비를 읽도록 허락된 자는 아무도 없으므로. 운하 옆 붉은 벽돌담. 이제 숨이 넘어가는 고양이에게 떨어지는 어리석은 햇살. 나는 오늘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답지 않았고, 유용한 곳에서 유용하지 않았다. 강을 따라 슬픔뿐인 갈대밭을 지나갔고, 몰락한 정원을 지나갔다. 깨어 있는 내내 나는 잠들어 있었다. 죽음을 경배하고 있는 자들 사이를 흘러가며 나는 수천 년의 은유에 비틀거렸다.

<Nile 407>

블팡

2024.10.27 조림

나는 여기에서도 나인 것처럼 거기에서도 나일 것이다. 갑자기 파리에 어울리는 근사한 나로 변모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42년간 몰랐던 자아를 거기에서 갑자기 찾을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 알면서도 떠나야만 하는 때가 있다. 공간의 형상을 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곳에 혼자 아무 말 없이 있는 인생의 한 조각이 필요한 것이다. 그 인생의 조각이 나의 남은 시간에 어떤 빛을 비춰줄지는 나만 알겠지.

조림

2024.10.26 블팡

트럭의 비명은 이따금씩 저기압이 몰려오는 날 아주 작게 들린다. 진한 사투리와 마른 기침. 알아 듣기 힘들지만 주제는 분명 생이다. 이별만이 번성했던 생. 나귀처럼 인내했던 생. 자살자의 마지막 짐을 실었던 생. 수몰지의 폐허를 실었던 생. 이제는 단종된 생.

- 아나키스트 트럭 2

블팡

2024.10.26 블팡

짧지 않은 폭설의 밤
제발 나를 용서하기를

- 들뜬 혈통

블팡

2024.10.26 블팡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 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오십 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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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6 블팡

시인의 말

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은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하다는 것을.

2016년 겨울
허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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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6 블팡

흔히 사진은 무엇인가를 이해하거나 인내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으로 쓰이곤 했다. 인본주의자의 용어를 쓰자면, 사진이 지닌 최고의 소명은 인간에게 인간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사진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확인해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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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6 블팡

예술가에게는 타인의 고통에 목소리를 되돌려 줄 권리가 있다. 혹은 예술가라면 그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좌우간 그것은 예술가 고유의 특성이다. 예술가는 자발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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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6 블팡

사진을 통해서 현실을 확인하고 사진을 통해서 경험을 고양하려는 욕구, 그것은 오늘날의 모든 이들이 중독되어 있는 심미적 소비주의의 일종이다. 산업화된 사회는 시민들을 이미지 중독자로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야말로 불가항력적인 정신적 오염이다. 아름다운, 표면 아래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목적, 이 세계를 구원하고 찬양하려는 태도 등을 절절히 갈망한다는 것 - 우리는 사진을 찍는 기쁨 속에서 에로틱하기 그지없는 이런 감정을 늘 확인하는 것이다. (...) 19세기의 가장 논리적인 유미주의자였던 말라르메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결국 책에 씌어지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것들이 결국 사진에 찍히기 위해서 존재하게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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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6 블팡

인류는 여지껏 별다른 반성 없이 플라톤의 동굴에서 꾸물거리고 있다. 그것도 순수한 진리의 이미지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블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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