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포획은 개발도상국에 관한 연구에서 기원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사회적 우위에 있는 사람들이 특히 해외원조와 같은, 다른 이들을 위한 금전적 혜택을 통제하는 경향을 설명하고자 등장했다. 하지만 이 개념은 더욱 일반적으로 적용되어 이론상으로도 실제로도 좋은 지위에 있고 자원이 많은 이들에 의해 정치 프로젝트가 하이재킹되는 방식을 설명해 왔다. 또한 이 개념은 어떻게 지식, 주목, 가치 등의 공공 자원이 권력 구조에 의해 왜곡되어 분배되는지 설명해 줄 수 있다.
행동가들 가운데는 변화에 관해 기계적 견해를 갖고 있는 듯한 이들이 많아 보이는데, 혹 그들은 엉터리 다이어트 알약이 선전하는 것처럼 “신속하고 손쉬운 결과를 보장”받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들은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것, 거침없는 인과관계, 즉각적 보답 등을 기대한 나머지 실망을 전문 분야로 삼게 되는데, 실망은 또한 원망, 냉소, 패배주의, 비아냥 등으로 고착되고 만다.
희망이 무엇이 아닌지 말하는 것은 중요하다. 희망은 모든 것이 과거에도 좋았고 현재에도 좋고 미래에도 좋을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다. 엄청난 고통과 엄청난 파괴의 증거가 우리 주위에 온통 널려 있다. 내가 관심을 갖는 희망은 구체적 가능성과 결합된 넓은 전망, 우리에게 행동하라고 권유하거나 요청하는 전망이다. 그건 ‘모든 게 나빠지고 있어’라는 식의 서사敍事에 맞서는 것일 수 있지만, ‘모든 게 잘돼가고 있어’라는 식의 화창한 서사도 아니다. 그건 복잡성과 불확실성에 관한, 돌파구를 열어두는 설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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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전제, 불확실성의 광막함 속에 행동할 공간이 펼쳐진다는 전제 위에 자리 잡는다. 불확실성을 인식할 때 우리는 자신이—나 혼자, 또는 수십, 수백만의 다른 이들과 힘을 합쳐—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난 이제 어떻게 해, 요카난? 홍수로도 해일로도 내 열정을 끌 수 없는데.
난 공주였어. 그런데도 당신은 날 경멸했지.
난 처녀였어. 그런데 당신은 내 순결을 앗아갔지.
난 정숙한 처녀였는데, 당신은 내 핏속에 불을 채웠지……
아! 아! 왜 나를 보지 않은 거야, 요카난? 날 봤으면 당신도 분명히 날 사랑했을 텐데. 분명히 당신도 날 사랑했을 거야. 사랑의 신비는 죽음의 신비보다 위대하지. 인간에겐 오직 사랑뿐이야.
죽은 이의 이름을 휴대폰 주소록에서 읽는다. 나는 그를 알 수가 없다. 죽음은 아무에게도 없는 어떤 것이니까. 신전의 묘비를 읽도록 허락된 자는 아무도 없으므로. 운하 옆 붉은 벽돌담. 이제 숨이 넘어가는 고양이에게 떨어지는 어리석은 햇살. 나는 오늘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답지 않았고, 유용한 곳에서 유용하지 않았다. 강을 따라 슬픔뿐인 갈대밭을 지나갔고, 몰락한 정원을 지나갔다. 깨어 있는 내내 나는 잠들어 있었다. 죽음을 경배하고 있는 자들 사이를 흘러가며 나는 수천 년의 은유에 비틀거렸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 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 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 블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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